매일성경

20221010 - "요압 각본 여인 연기"(삼하14:1~20)

요압은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도망다녔던 다윗 곁에서도 고난을 함께 나눴고, 나중에 다윗의 군총사령관으로 다윗 다음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다윗의 뜻에 반하게 죽인 다음부터 그와 다윗 사이의 금이 결정적으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왕인 다윗에게 충성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자기의 야망을 위한 위장이었던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장남이자 이복 형인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간 압살롬과 소식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3년이 지나가는데 압살롬의 귀환에 대해 한 마디도 없는 다윗의 마음을 요압은 돌려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의 아들들 중에 왕이 될 만한 자는 압살롬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그는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 다윗에게 가서 연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각본은 물론 요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다윗 앞에서 주어진 각본에 따라 연기를 했습니다. 자기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서로 다투다가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서 동생을 죽인 큰 아들을 내놓으라며 그를 죽이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이지만 큰 아들마저 죽으면 상속받을 자가 아무도 없어 이를 어찌하면 좋겠냐는 하소연이었습니다. 다윗은 여인에게 사람들이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동생을 죽인 형은, 형을 죽인 압살롬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활한 요압이 살짝 비틀어서 각본을 짠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점점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내쫓긴 자를 왕이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하면서 다윗이 지금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쳤습니다. "내쫓긴 자"는 다름 아닌 압살롬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그렇게 둔한 사람이 아닌 다윗이 그 이야기의 전개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 당연합니다. 다윗은 여인에게 그 모든 것을 요압이 시켰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떨면서 사실을 직고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지혜가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신다고 아첨하며 다윗을 칭송했습니다. 죽음을 면해볼 심산이었습니다.

요압, 암몬의 랍바 성을 거의 다 점령해놓고 왕인 다윗에게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는 등 참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왕의 뜻보다 자기의 야망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그 멋진 모습조차 위선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저 베풀고 잊어버려야지 돌아올 것을 계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의 섬김이 결국 내게 더 이익이 되겠는가를 고려할 때, 그것은 이미 변질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나, 그저 주는 것으로 계산을 끝내야하겠습니다.

드고아의 여인이, 나라의 제2인자 앞에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참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에, 교활한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던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의 길에 서지 말았어야 합니다. 말 같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일상의 삶 속에서 작은 것으로부터 참과 의를 선택해야하겠습니다.
작성자
이인호
작성일
2022-10-10 09:03
조회
1004
전체 1

  • 2022-10-10 10:29

    암논을 죽여 원수를 갚은 압살롬은
    다윗왕의 눈을 피해 3년동안 "그술"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3년이 지나, 다윗 왕의 슬픔이 사그러질 때 쯤
    요압 장군은 다윗 왕의 마음을 읽고, 압살롬의 귀환을 위한
    계략을 짭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의 살인교사와 불륜 죄를 드러내기 위해
    다윗 왕 자신이 비슷한 판례를 만들게 했듯이
    드고아 여인의 판례로 "압살롬"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듭니다.

    왕의 마음을 읽고, 부자간의 화해의 장을 열어 준 요압의 지혜는
    정말 배울만 합니다.

    제가 일하는 업계에 불문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절대 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석유화학 플랜트 건설 시장이 크질 않아, 지금 척을 졌더라도
    어느 현장에서든 꼭 다시 만나 일을 해야 하기때문에 생긴
    불문률인것 같습니다.

    사회는 "이익"이라는 한가지 목적으로도 이렇듯 화해를 하는데
    "사랑"이라는 한가지 목적으로 모인 교회에서 화해가
    이렇듯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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