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20221019 - "참으로 아쉬운 점"(삼하18:19~33)

압살롬에게 쏠렸던 이스라엘을 상대로 다윗 군대는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반역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압살롬은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그 기쁨의 승전보를 다윗에게 빨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령관 요압은 그를 막으며 다른 날에 전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스 사람에게 승전보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아히마아스가 물러서지 않고 간청을 하자 요압은 허락을 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을 앞질렀습니다.

승전보에 기뻐할 것으로 예상한 다윗의 반응이 별로였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됐는가를 물을 때 아히마아스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반역자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기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쉬운 면은 자기의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남의 감정을 살피지 못한 점입니다.

아히마아스에 이어 도착한 구스 사람으로부터 역시 승전보를 들은 다윗은 아들 압사롬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는,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심히 아팠습니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비록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아들이었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 무너지는 아비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목숨 걸고 싸운 병사들을 다윗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도 왕에게 있어서는 자식과 같은 귀한 자들임을 다윗은 알았어야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점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이것은 병사들도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생포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압살롬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왕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있으며, 자기는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항명을 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역시 사사로운 감정에 자기 동생을 죽인 아브넬을 죽인 것을 망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내로남불(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과 동고동락을 하였지만, 그 둘은 무언가 계속 평행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함께 마음을 터놓고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었다면 좀 더 깊은 소통이 이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압의 판단과 처신 역시 참으로 아쉬운 면입니다.

내 감정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도 헤아릴 줄 알아야하겠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야하겠습니다. 특히 공적 자리에 있을 때 이 점을 더욱 더 유의해야할 것입니다. 내 생각만 옳다 하지말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좀 더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점"(삼하18:19~33)

작성자
이인호
작성일
2022-10-19 08:21
조회
1111
전체 1

  • 2022-10-19 13:18

    미국의 어느 교회 Consultant가
    수천 개의 교회 멤버들에게 "교회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응답자의 89%가 "교회의 목적은 나의 가족과 나의 필요를 돌보아 주는 것"이라 대답했고, 목사의 역활은 단순히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행복하게 유지하고
    너무 많은 양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오직 11%의 응답자가 "예수님을 위해 세상을 이기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고
    답했습니다.

    같은 교회 목사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는데
    90%는 "세상을 이기기 위함" 이고,
    10%만 "교회 멤버들을 잘 돌보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하네요.
    교인들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지요.

    다윗과 요압, 아히마이스 모두 각자 자기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 있을까요?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는 순간, 서로 감정이 폭발하고
    관계가 깨지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왕의 슬픔에는 함께 슬퍼하고,
    복권을 기뻐하는 "아히마아스"와는 함께 웃고,
    이성적 판단으로 위험의 잔재를 없애버린 "요압"의 공은 칭찬해 주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난무한 세상에
    위로와 공감을 얻고, 줄수 있는 공간이 어디 없을까요?

    그런 공간이 교회 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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