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20211123 - "진정성 있는 삶"(삿10:1~18)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서로 앙숙관계였으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악의 세력들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뭉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중심에 욕망이 도사리고 있어 그것은 서로 충돌하고 찌르는 본성을 결국 드러냅니다. 세겜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악과 잔인한 학살에 동조하며 그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권력이나 부가 그들을 비켜 가버렸던 것입니다. 세겜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공멸하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 이후 돌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23년을 통치했습니다. 돌라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야일이 이어 사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평화로운 권력이양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뛰어난 업적은 없었을지 모르나 돌라는 전임자 아비멜렐을 본받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돌라의 뒤를 이어 사사가 된 야일은 아들만 30명을 두었는데, 어린나귀 30마리와 성읍 30개를 각자에게 하나씩 주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고급 승용차와 호화 저택과 금싸라기 땅을 준 것이지요. 말이 사사이지 왕이 된 것입니다. 기드온이 연상됩니다. 야일은 22년을 통치했는데 전임자인 돌라의 통치시기를 합하면 45년 동안 이스라엘은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평온은 속에 수많은 이방 신을 숭배하는 타락과 부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왜 모르시겠습니까? 진노하셨습니다. 블레셋과 암몬 자손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곤고가 다시 극심해졌습니다. 18년 동안 억압을 받은 이스라엘백성은 자기들의 범죄를 인정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배은망덕한 짓을 행하는 그들의 진정성 없는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우상은 그대로 덮어둔 채로 입으로만 잘못했다고 하며 흘리는 거짓 눈물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백성은 구체적으로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진정이 보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셨던 것이지요.

돌라는 악의 화신 아비멜렉을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묵묵히 사명의 길을 가며 백성을 다스리고 섬겼습니다. 야일은 왕 행세를 했습니다. 기드온의 교만을 답습한 것이지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일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온 나라에 우상이 창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다시 한 번 각인하며 겸손히 나를 비우고 주님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탐심입니다. 우상을 제거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탐심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11123 - "진정성 있는 삶"(삿10:1~18)

작성자
이인호
작성일
2021-11-23 09:30
조회
1744
전체 1

  • 2021-11-23 12:39

    "다시" "또" 사사기 전반에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보기에 얄미울 정도로,
    압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이방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던 것일까요?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기본 쾌락 욕구를 통제하는 반면
    이방 신들의 법은 인간의 기본 쾌락 욕구를 허락할 뿐아니라
    장려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Nudge (넛지)라는 책을 읽으며
    육체의 소욕은 행동하는 자아(Doer)이고,
    근시안 적이며, 자동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성령의 소욕은 계획하는 자아(Planner)이며,
    원시안 적이고, 숙고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을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인간의 뇌를 통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육체의 소욕"을
    어떻게 숙고 시스템인 "성령의 소욕"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훈련" "고행" "단련" 이런 것들도 숙고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가되겠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내가 완벽하게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압제를 당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연히 구하게 되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도와주세요."
    라는 기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하루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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